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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문화

[열정문화][#71] 한 철학과 교수가 판사를 죽였다.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이레셔널 맨(Irrational Man,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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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판사가 죽었다.

사인은 심장마비.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건강한 습관을 가진 판사가 토요일 아침, 조깅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이 뉴스에 나왔다.


하지만, 곧 그 판사는 '청산가리'에 의한 살해당한 것임이 밝혀졌다.

FBI는 수사 끝에 한 사람을 지목하여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유명한 철학과 교수이다. 논문은 물론, 학계에서도 유명해 작은 도시의 대학에 부임하게 된 것 부터가 굉장한 이슈다.

하지만 그는 삶에 의욕이 없고, 동기조차 없어 매일 술에 의존하면서 하루 하루를 덧없이 살아간다.

그러던 그에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욕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살인'.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시골에 살지만, 아주 똑똑하고 예쁜 외모를 가진 대학생이다. 

교양있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잘생기고 이해심이 깊은 남자친구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 부임한 교수에 관심이 갖게 된다.

우울해보이며, 자기 비판적인 교수의 모습이 왠지 딱해보이기도 하면서도, 자신이 갖지 않은 지적 감수성과 철학적 관점을 갖춘 그에게 애정이 가기 시작한다.


교수는 자신을 사랑하는 제자와 깊은 관계를 경계하지만, 

한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된다. 



세상을 바꾸고자 책을 쓰고 있던 그를 가로 막은 우울함과 절망감을 삶에의 욕구와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살인'에 대한 의욕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우연히 제자와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옆 테이블에서 부인의 대화를 듣게 된다.

자녀 양육권으로 법정에서 싸우고 있던 그녀는

남편과 남편의 변호사가 판사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패소를 하게 된다.

판사의 잘못된 판결로 인해서 불행해지 그녀는 판사가 암에 걸려서 죽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 대화를 듣던 교수는 결심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가치있는 일을 하고자 그녀의 행복을 가로막는 판사를 죽이기로.


교수와 판사는 어느 관계도 아니기 때문에 

살인 용의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그는 판사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 때부터 그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았던 삶의 욕구가 생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를 죽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함께 판사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그의 제자와 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판사의 용의자는 교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디 앨런은 세상을 희화화하는 영화를 많이 만들어왔다.

인물들의 대사들과 배경 속에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많이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300개 이상의 영화를 만든 우디 앨런이 이번에 선보인 이 영화는

'정당성'에 대한 영화다.


영화 도중에 철학 교수인 에이브는 종종 '하이데거' 철학에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한다. 

도대체 이 영화 속 상황과 하이데거의 철학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그래서 찾아봤다.


하이데거 철학은 나치즘과 무관한가?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구체적 삶과 떼어놓고 보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사상과 삶을 엄격하게 떼어놓고 보기 힘든 때도 있다. 하이데거와 같은 경우는 더 그렇다. 그는 평생 강의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은 모범적인 학자의 전형이다. 그에게는 세속적 취미 생활이 거의 없었다. 신문도 거의 읽지 않았으며, 집에는 텔레비전 수상기도 없었다. 그는 글을 읽고 쓰고, 철학적 사유를 하는데 모든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그의 길지 않은 총장 재임 시절의 오점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오점이란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한 사실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공식적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다. 가장 포괄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은 1966년 9월23일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다. 하이데거의 희망에 따라 사후에 발표된 이 인터뷰에서도 하이데거의 입장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오류를 인정한다.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오해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명한다. 그러나 그는 나치에 참여했을 당시에 가졌던 정치적 견해와 철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주장을 펼친다. [슈피겔]이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했지만,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철학적 주장을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그래서 과연 하이데거가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가 범했던 정치적 오류와 똑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또 무엇보다 개인적 인물로서의 하이데거가 아니라 사상으로서의 하이데거 철학이 과연 파시즘과 무관한가 하는 질문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끝내 석명하지 않은 것이 더 아쉽게 느껴진다. 그 이유가 유달리 강한 그의 자존심 때문이었지, 변함없는 정치철학적 소신 때문이었는지도 여전히 모호하다.

- 네이버 캐스트, 하이데거


총장 재임 시절, 나치에 부역한 사실에 있어서 어떠한 의견도 표명하지 않았던 하이데거.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과 

영화 속 주인공의 판사의 살해,

이 것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 본다.


'정당한' 살인이라는 것이 있는가?


비록 의로운 살인이라고 할 지언정, 

사람으로서 상대방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영화 속 소재이긴 하지만,

한 번 쯤은 생각해볼 소재이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의 행복이 위협을 받는다면,

그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


많은 살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 살인 사건들에게서는 특별한 동기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우발적 살인들도 많다. 


하지만 동기가 뚜렷할수록,

살인에 대한 계획이 치밀할수록

형량은 많이 받게 된다.


결국에는 어떤 죽음에 대한 동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을 심판하는 것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닌

'법'과 '제도'에 의해서 심판이 되어야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규율이며,

굳이 교육을 하지 않아도 서로간의 암묵적 약속인 것이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교수의 선택을 비판한다.

자신이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서 판단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념과 의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벌인 살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순수한 '의도적 살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의도적 살인은 또 다른 살인으로의 발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교수가 살인 이후, 자신이 보여준 떳떳한 행동과 신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지도 모른다. 

그 판사의 죽음으로 인해서 어떤 사람은 행복을 얻을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행복은 결코 이타적인 행복이 아닌, 이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판사의 죽음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영화 속 프레임은 우리를 죽음의 목격자이자 방관자로 만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똑똑한 질의 집요한 수사 과정에서 이 모든 행동들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고,

우리는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이렇게 

우리에게 생각할 소재를 던진다.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의 사상과 

실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의 소재를 연결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이야기한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살인은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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